삼위일체 대축일 (Posted on 6/11/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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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 (Posted on 6/11/2017)

Postby markclc_admin » Mon Jun 12, 2017 10:02 pm

요한 3: 16-19: 삼위일체 대축일: 목3동

가장 많이 접하고 있으면서 가장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삼위일체. 우리가 성호경을 그으면서 기도를 시작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드리고 마친다. 우리는 교리를 배울 때,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배우고 믿는다. 세가지 위격이지만 본질은 하나이신 하느님. 셋이며 하나이시다. 무슨 의미인가?

그런데 삼위일체대축일이 다가오면 신부님들은 강론준비를 할 때 식은 땀을 흘리시지 않을까 한다. 때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심볼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한다. 1) 세개 잎이 달린 토끼풀 2) 유럽 여러나라에서 보는 세가지 색깔을 지닌 국기 3) 어린이 교리에서 자주 인용하는 빛, 눈에 보이는 불,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열을 발산하는 초 4) 오늘 아침에 우리 공동체 아침 식탁에서 나온 이야기: 뜨거운 물에 탄 커피 믹스. 커피와 설탕과 프림의 절묘한 조화! 5) 제가 오늘아침에 비맞으며 걸으면서 떠오른 이미지: 바뀌: 가운데 축이 있고 커다란 바퀴 휠이 있고 중심축과 휠을 이어주는 바퀴살. 이 세가지 서로 유기적인 관계안에 있어야 무거운 짐을 수레로 옮길 수 있다.

마틴 루터는 삼위일체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려고 하면 당신의 구원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하면 정신이상자로 몰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고 삼위일체는 풀지못할 문제이기에 밀쳐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기에 지속적인 이해의 노력은 필요. 11세기의 영국의 안셀모 성인은 ‘알기 위해 믿는다’는 명제를 말함. 오늘 강론은 삼위일체가 실재임을 믿고 그 이후에 삼위일체교리를 이성적이고 실제적인 성찰을 통해서 더 믿으려고 하는 나의 신앙의 길을 이야기하고 싶다. 즉 삼위일체를 먼저 이해하기보다는 삼위일체를 믿고 어떻게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에 초점을 두는 것은 어떨까 생각으로 3가지 요점으로 오늘 강론을 준비:

1. 사랑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16)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무엇을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사랑 때문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의 실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시면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는 길을 마련하신다. 그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분은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세계로 빈손과 맨몸으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사랑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그분의 사랑의 방식은 자신의 삶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겠다는 열린 태도였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수용에 바탕을 둔 삶이 사랑에서 비롯되는가를 질문한다.

2. 조화

우리가 쉽게 빠지는 착각 한가지는 집착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지나치게 고집하는 것은 상대방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를 구속하는 족쇄일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제가 아침에 생각한 바퀴 이미지에서 중심축, 바퀴살 그리고 바퀴의 휠 중 어느 것 하나난 작동을 할 수 있게 한다면 바퀴는 깨져버릴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퀴는 무거운 짐을 옮길 수 있는 기능을 한다. 오늘 우리는 상대방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의 법칙을 고집하지는 않는가하는 질문을 한다. 그런 태도는 당사자들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다. 나의 어떤 부분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것안에 살기 위한 적극적인 구원의 행위인 것이다. 삼위일체는 나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있을 것 같지 않은 영역까지 나의 삶에 포함시키는 통합의 삶이라는 것이다.

3. 처신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사도는 성삼위에 어떤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을 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코린토 둘째 편지 13:13) 우리는 성부 하느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사랑으로 부서진 세상을 하느님과 다시 화해시키셨고 성령은 사랑으로 위로자이자 협력자로서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소명을 공동체를 위해서 알맞은 처신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오늘 다시 한다. 콜로새인들에게 보낸 서건에서 바오로사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상이 되도록 권고받는다.(1:15)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스도가 될 때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나라가 현실화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으로 우리는 개인주의를 거부하지만 우리만의 특수성을 살아내어야한다.

결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지독한 사랑의 표현이다. 믿음은 지적인 고민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삼위일체 대축일에 인간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이웃과의 사귐을 깊게 확장하여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현재 어디에 있는가를 성찰하고 있는가? 그런 성찰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자기비판이나 자기비하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족하기에 더욱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높이기 위한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런 자기 성찰은 우리를 하느님의 삶으로 이끌어가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潛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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