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대축일 (Posted on 6/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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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대축일 (Posted on 6/4/2017)

Postby markclc_admin » Sun Jun 04, 2017 6:48 am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목3동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 전례력으로 부활시기에 매듭을 짓는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려와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가 태어난 생일을 기념하는 날. 성령은 그리스말로는 parakletos라고 하는데 그 단어적 의미는‘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서 그 사람의 옆구리로 파견된 자”라는 뜻으로 변호인, 매개자, 협력자, 위로자 등의 의미를 지닌다.

성령의 존재가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 대주교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냐시오 드 라타뀨이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고,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실 것이며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할 것이고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고 선교란 선전광고에 불과하며 전례란 회상일 뿐이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불과할 것이다.

오늘 1독서 사도행전은 성령강림 사건은 한마디로 '말씀의 사건'이라고 설명. 우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모습을 보자.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내린 성령은 '비둘기' 모양. 그런데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내린 성령이 '불꽃 모양의 혀'의 모양. (2:3) 성령이 내리자 사도들이 한 첫 번째 일은 다름 아닌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대로 다른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을 살아가는가를 판단하는 척도는 다름아닌 나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을 하는 것. 세상을 향해, 그 시대를 향해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는가요?



그럼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잃고서 제자들은 지금 두려움 속에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어떤 집에 모여 은둔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단절되어 스스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남으로 해서 폐쇄된 세상은 개방된 세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제자들을 보자 "평화가 너회와 함께"라고 인사한 예수님은 곧바로 자신의 두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준다. 평화를 빌어주고 자신의 상처를 제자들에게 상기시키는 말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여신다. 상대방에게 평화를 빌어주고 동시에 나의 약점이나 상처를 보여줄만큼 그들의 마음의 벽을 낮출 수 있는 나의 내적태도를 보여주는 것. 내가 쌓고 있는 벽은 무엇인가 한번 바라봅시다. 오늘 대축일은 성령의 지혜의 빛으로 우리 내면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 과연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움이 많은 상처가 많은 세상이어도 하느님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세상을 보는가?



곧바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로 제자들이 이제는 방에서 나와서 세상속으로 뛰어들라는 파견을 명령합니다. "왜 문을 꼭 닫아걸고 세상과 단절하고 있느냐? 막힌 담을 허물고 소통을 해야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의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공감하는 우리의 태도를 말하는 것. 공감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상대방의 의식에 대한 배려와 관심의 지속성을 이야기하는 것. 성령의 언어는 닫힘이 아니라 열림이고 주저앉음이 아니라 길을 떠남.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는 부분은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이야기를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으로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라고 말한다.(창세기 2:7) 따라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보내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제 2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숨결을 받은 제자들은 새로운 창조를 살아가게 되었고 성령을 받은 우리도 제 2의 창조를 살아가도록 초대받는 것이 성령강림 대축일의 한 의미이다.



그런데 어떻게 제 2의 창조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성령감림의 결과는 용서와 화해라는 말씀이다. 용서는 새로운 창조의 이미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자신과 남을 용서할 때 바로 그곳이 성령의 움직임이 감지되는 곳이고 새로운 창조의 숨결이 흐르는 곳이 된다. 용서한다는 것은 더이상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고 미래를 희망의 친구로 삼아 함께 걸어가겠다는 말. 그 길을 다름이 아니라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서 새 창조의 길을 가겠다는 자기 선언이다. 따라서 성령강림 대축일은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일러준다. 우리는 자주 시간을 과거로부터 조건화된 행동이나 생각에 파묻혀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은 10%의 일어난 일과 90%의 일어난 일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 구성 (Charles Swindoll) 오늘도 우리의 마음은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선호하고 미리 입력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우리의 경험들을 분류하여 인식하고 습관적으로 받아들임. 하지만 하느님의 영을 따라사는 삶이란 그런 과거의 사슬을 버리고 미래의 희망을 살아가겠다는 것.



결론: 성령을 생각하면 방언을 하는 등의 어떤 신비체험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신비체험밖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하느님의 영을 일상에서 체험하고 살아가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이 단순한 말씀이 제자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옴.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와 파견과 용서의 성령의 말씀이 우리의 옆구리에 살아계시기를 기도. <潛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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